2012년 4월 쯤의 일이다.


회사에서 추진하는 발전소 주기기 입찰초청 미팅이 있었다. 지멘스와 미쓰비시 중공업이 입찰에 응했다.


두 입찰사가 각각 ITB(입찰초청서)를 받고 이에 대한 deviation(입찰초청서의 조건에 대한 이견)을 협의하기 위해 미쓰비시와 먼저 미팅을 가졌다. 미쓰비시의 ITB에 대한 deviation은 거의 없었다. 상업적 조건이든, 기술적 조건이든 우리(발주사)가 원하는대로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과 허리 숙임과 함께 왠만하면 다 맞춰주겠다고. 철저히 을의 입장에서, 전형적인 영업맨의 자세로 우리에게 응했다.


그러고 며칠 후, 지멘스와 미팅을 가졌다. 참 가관이었다. ITB 내용의 거의 절반 가까이 deviation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항목 별로 조목조목 따지면서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못하겠다며 계약 내용을 송두리째 바꾸려고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너무도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누가 발주사고 누가 입찰사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렇게 16시간 가까이 마라톤 미팅을 끝내고, 술 한잔 하면서 어느 부장이 얘기를 해줬다. 지멘스가 저렇게 을의 입장이면서도 고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제품의 퀄리티 때문이라고. 지멘스 주기기로 발전소를 지을 경우, 타사의 주기기로 지었을 때보다 발전효율이 약 2~3% 가량 더 높게 나온다고 한다. 이 정도 효율이 차이나게 되면 발전소 건설 투자비용을 모두 회수하는 데에 드는 기간 10년에서 8년으로 약 2년 정도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효율 싸움에서 지멘스는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 뒤통수에 뭔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는 만들어야 제조업 좀 한다고 할 수 있구나. 그리고 영업이라는 게 무조건 숙이고 들어간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자기만의 경쟁 우위와 차별화 포인트를 내세워서 자기 판으로 끌어들여 자기 판의 룰을 따르게 만드는 것. 이게 진정한 사업이고 비즈니스고 영업이 아닐까.


결국엔 미쓰비시가 낙찰을 받긴 했지만, 지멘스는 여전히 중동 발전프로젝트의 무조건적인 주기기 선정업체로 군림하고 있으며 세계 주기기 시장의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나도 이런 제조업체 하나 만들어야지.

Posted by 얼간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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